시나리오에 대한 치명적 스포일러가 가득하므로 플레이 예정이신 분들은 읽지 않으셔야 합니다.
제 플레이를 바탕으로 두서 없이 감상을 쏟아낼 예정이므로, 플레이 후기 란에 올린 <네게 헬리오트로프를> 후기를 먼저 읽으시면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안 읽으셔도 플레이/마스터링 경험이 있거나 시나리오를 읽었다면 무슨 얘기인지 다 아실 것 같지만요.
이 내용은 제 플레이를 기반으로 한 주관적인 감상입니다. 같은 시나리오를 플레이하셨더라도, 심지어 같은 마스터님과 플레이를 했더라도 개인의 감상은 크게 차이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 해석일 뿐, 캐릭터 간의 관계에 대한 다른 해석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르게 해석하시는 분들과도 의견 나누고 교류하고 싶어요ㅠㅠ
전체적으로 어두운 내용입니다. 트위터에서 스포를 피해 추상적으로 썼던 몇몇 트윗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두서없이 떠오르는 것들을 써봤습니다.
저랑 헬리오트로프 얘기해주세요!!!ㅠㅠㅠ
플레이 당시와 이후 한동안은 오브에 대해서 아련한 감정만을 갖고 있었다. 애니를 사랑하고 지키려 한, 소중한 사람. 소중한 가족.
그리고 몇 주 전, 후속 시나리오가 공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후속작 플레이에 도움이 되도록 내가 생각한 오브와 애니의 관계를 간단하게 썰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브 쪽은 전에 이미 생각해둔 게 있었다. 구상은 쉽게 떠올랐고, 구체화하고 좀 다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클론 애니가 진짜 애니인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애니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미치광이의 집착일 뿐인지 의심하는 오브의 심경에 관한 썰이었다. 그러면서도 환하게 웃는 클론 애니를 바라보며 애니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르더라도 애니를 살려내겠다는 다짐을 하는 오브.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내용으로 애니 시점의 썰을 풀려고 했다. 함께 집에 돌아와서 지낸 열흘에 있었던 이야기였다. 잠든 오브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주무세요, 아버지."라고 말하는 애니. 저 대사를 말하는 걸 보고 싶었다.
그런데 애니 시점의 썰이 아무리 해도 안 나오는거야.... 오브는 그렇게 술술 써졌는데.
그때부터 플레이어인 나의 아련함, 애틋함과는 별개로 애니는 오브에게 어떤 감정이었을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애니는 에른에게 감사와 아련함, 애틋함만 남았을까?
애니는 에른을 조금은 원망했을 것이다.
소중한 가족이고, 사랑하고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이 원망했을 것 같다. 수조에 쌓여 있던 시체들과 자신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에른은 자신을, '애니'를 죽였다. 최소한 죽도록 방치했다. 반복해서. 그걸 알게 된 애니는 에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애니를 칼로 찌른 범인과 에른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을까.
시나리오에서 PC가 오브에게 '내가 누군지 아느냐'라는 질문을 하면 오브는 '나도 아직은 모르겠어'라고 대답한다. 오브는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애니를 '애니'라고 취급하지 않는다. 애니의 진위를 혼자 재단하고 가치를 결정해버린다.
사실 나는 플레이 중 수조에 쌓인 시체도, 오브에게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겠어'라는 말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플레이 중에는 애증을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되찾고 밀려드는 감정과 혼란을 미처 추스르지 못한 채 미고를 파괴했고, 집으로 돌아와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매끄러운 까만 상자를 보다가 문득. 애니는 다시 에른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테니. 그는 내가 아는 에른일까, 그가 나를 죽인 게 아닌가 하고. 그리고 남겨진 메리골드 꽃다발을 바라보며 조금씩 확신하겠지. 아련함과 애틋함은 여전하지만 원망도 조금씩 점점 크게 자라서 애증이 되고.
플레이에서 에필로그를 들으며, 에필로그 이후 외진 숲 속의 집에서 혼자 조용히 담담하게 살아갈/죽어갈 애니가 그려졌다. 매 들숨과 날숨이 모두 저항이고 거부가 될 것이다. 가장 느린 자살이고 가장 격렬한 저항일 여생.
처음에는 애니가 조용히 죽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애니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저항이 될 것이었다. 세계와의 싸움이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싸움이고, 아버지 같은 에른스트와의 싸움.
에른은 자녀를 과잉보호하거나 과잉간섭하는 부모와도 비슷할 것 같다. 사랑이 기반이 된 행동이지만 자녀에게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원망하지만 그것도 나를 사랑해서임은 부정할 수 없어서 싸우거나 밀쳐내기도 힘든. 내게 애니는 에른의 사랑이 담긴 폭력의 희생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아 오브 참 상냥하고 다정하고... 우리 애도 오브 정말 많이 (가족으로서) 사랑하는데 좀 상냥한 개새끼같을 때도 있다. 메리골드 꽃 그거 진심으로 애니가 어디서든 행복하라는 기원을 담은 거 알지만 야 니가 이렇게 만들어놓고 진짜로 애니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맘 편한 소리나 하고 있어도 되냐 하면서 멱살도 좀 잡고싶어진다... 후속작에서 내가 과연 오브 멱살을 잡을 기회가 있을 것인가... 전 잡을 기회가 있으면 꼭 잡을 것입니다
오브에 대한 애니의 감정은 애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일거라 생각하고, 플레이어로서는 오브 멱살도 좀 잡고싶긴 한데 토닥토닥도 해주고 싶다. 오랜 시간 희망의 탈을 쓴 악의와 절망에 매달려서 스스로를 깎아먹으로 지내왔을 불쌍한 사람...
그래도 멱살은 잡을 거지만.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너는 우리 애니에게 해선 안 될 짓을 했다...
후속 시나리오 설명에서 '오브를 구할 기회'라는 문구를 보고, 나의 애니는 과연 게임오버 급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를 구하려 할지 생각해봤다. 원망하면서도 자책하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좀먹을 애니는 과연 오브를 구하려 할까. 결론은 '구하려 할 것이다' 였다. 그래도 사랑하니까. 소중한 가족이니까. 하지만 에른을 구해내서 과거의 행복했던 가정을 되찾고 싶은 마음만은 아니겠지. 그것도 분명 있겠지만 그것만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애니는 에른 대신 죽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에른이 만들어낸 '애니'를 에른을 구하기 위해 망가뜨리고 절망하는 그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싶어 할지도. 애니가 에른에게 복수하고 싶어한다면 그게 최고의 복수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까지 비틀린 감정이 아니더라도, 에른을 다시 만나 따지고 싶어하는 정도라도.
헬리오트로프 플레이 후에 내 안에서 애니의 이야기는 끝나버려서 후속작 소식을 들었을 때 잠깐 망설였는데, 역시 플레이하고 싶다. 애니를 독립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에른스트에게서. 뒤늦게 자각해서 비틀리며 자라난 원망을 완결지어주고 싶다. 가능하다면. 원망하며 죽든, 새로운 삶을 선택하든. 함께 살아가더라도 지금처럼 짓눌릴 정도의 마이너스 감정을 안고 살지 않도록. 모든 감정을 완전히 털어내진 못하겠지만. 청소년기를 완결짓고 정신적으로 독립해 성인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후속작에 있어서 플레이어로서의 사명이 생겨버렸다... 애니를 독립시키는 것. 그리고 오브 멱살 잡기...
애니가 오브 이성체크 한번 시켜주게 하고 싶기도... 하다... 음 이거 마스터님께 트롤링이 될 것 같으니 하지 말아야지.
전개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뭘 해야지 하고 상상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오브 멱살 잡고 싶다고는 하지만 그럴 기회가 있을까. 아니 애니가 오브에게 자기의 심정을 토로할 기회가 오긴 할까...? 끝내 못 말하고 죽거나 돌아오는 것도 괜찮은 전개이긴 하지만.
그래도 에른스트와 재회하면 고의로 에른을 '오브'라고 부르고 싶다. 그럼 에른이 좀 상처받으려나.
에른이 애니를 애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데 애니도 에른을 에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치기 어린 발상이지만 원망을 담아 에른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브라고 부르는 애니가 보고 싶다. 에른은 그 호칭을 듣고 멈칫했으면 좋겠다. 상처받으면 더 좋을 것 같고...